예쁘다는 이유만으로 무언가를 사는 일도 드물다. 그런 사람의 집에는 ‘예쁜 쓰레기’가 별로 없다. 그런데 예뻐서 산 것이 없다는 말이, 기분으로 산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노트북은 죄가 없다
누군가 노트북이 느려 일이 자꾸 밀린다고 느낀다. 그래서 새 것을 산다. 여기까지는 필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결제하는 순간 함께 산 것이 하나 더 있다. ‘이걸 쓰면 좀 더 잘 해낼 것 같은’ 기분이다. 여러 프로그램을 한꺼번에 돌려도 버벅거리지 않을 거라는, 그래서 밀린 일이 풀릴 거라는 기대.
일이 밀린 게 꼭 기기 탓만은 아니었는데도.
노트북은 빨라졌다. 하지만 ‘더 유능한 자신’이 노트북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1층이 갖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더 큰 선택도 다르지 않다. 이사를 결정한 어느 집의 장면이 있다.
아이가 크면서 집 안에서 자유롭게 노는 것을 자꾸 막게 된다. “뛰지 마.” “조심해.” 그 말을 하는 것이 싫어서 결국 1층으로 이사를 정한다. 층간소음, 아이의 활동량. 모두 분명한 필요다.
이사를 앞두고 아랫집에 인사를 갔더니, 뜻밖의 말이 돌아온다. “애가 있는데 뛰는 소리가 한 번도 안 났는데요.”
정말 갖고 싶었던 것은 ‘1층’이라는 층이 아니었다. 아이에게 뛰지 말라고 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 아이를 제지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 그 상태가 갖고 싶어서 이사라는 번거로움을 감수한 것이다.
필요라는 이름의 뒷면
그러니 ‘필요해서 샀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필요의 밑을 조금만 파보면, 거기에는 어떤 기분이 함께 있기도 하다. 우리는 물건을 사는 동시에, 그 물건이 데려올 것 같은 상태를 산다. 더 유능한 자신, 눈치 주지 않아도 되는 하루 같은 것.
광고는 이 자리를 정확히 안다. 그러니 물건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진 사람의 상태까지 함께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로만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다른 기대는 있을 수 있다. 기대의 얼굴이 위로나 소속감이 아니라, 유능함이나 편안함일 뿐이다.
노트북은 빨라질 수 있다.
1층에서는 아이가 뛸 수 있다.
그러나 그다음까지가 산 것의 몫은 아니다.
그 기대를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물건에 마음을 얹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원래 그렇게 산다. 그러니 사고 난 뒤 어딘가 채워지지 않아도, 그건 잘못 산 탓이 아니다.
사지 말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무엇을 사면서 무엇을 함께 기대하고 있었는지, 그 정체를 한 번쯤 들여다볼 수는 있다.
만드는 쪽에서 하지 않으려는 약속
물건을 만드는 자리에 서 보면, 이 기대는 유혹이기도 하다. “이걸 사면 하루가 달라진다”고, “당신의 허전함을 채워준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말하면 누군가가 더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물건이 지킬 수 없는 약속이다. 지킬 수 없는 것을 약속하는 순간, 그 물건은 도착하자마자 실망이 될 준비를 하고 온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을 배송해 준다고 말하지 않으려 한다. 물건 하나가 사람을 갑자기 괜찮게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다만 물건을 만나는 순간 잠깐, 하던 생각을 멈추고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한번 볼 수는 있다.
“어, 나 이런 맛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네.”
“몰랐는데 이 향도 좋네.”
우리가 설계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