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즐거움과 갖는 즐거움
우리는 흔히 물건을 산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마다 사고 있는 것은 조금씩 다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필요해서 사고, 누군가는 가지고 싶어서 사고, 누군가는 고르고 결제하는 그 순간이 좋아서 산다.
사는 즐거움과 갖는 즐거움, 쓰는 즐거움은 서로 다르다.
사는 즐거움에서 이미 만족의 대부분을 얻는 사람이 있다. 고르고, 자기 것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목적의 상당 부분이 끝난다. 그래서 물건이 도착한 뒤에는 마음이 먼저 시들어버리기도 한다.
어른도 다르지 않다. 그렇게 기다리던 물건인데 택배가 도착하면 관심이 사라져 며칠씩 뜯지 않기도 한다. 사기 전까지는 검색하고, 비교하고, 장바구니에 넣었다 빼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 결제를 한다. 그런데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 물건은 전혀 다른 시험을 받는다.
구매는 가치의 완성이 아니다
돈을 지불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자기 돈과 바꿀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때로 사람들은 물건의 가치가 아니라 사는 경험에 돈을 지불한다. 찾는 재미, 고르는 재미, 결제하는 순간의 작은 흥분. 기다리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하나의 소비 경험을 산다. 그러니 구매가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 그 물건이 그 사람에게 가치 있는 물건이 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떤 것은 구매한 뒤에 다른 가치가 생긴다. 계속 손이 가거나, 어떤 기억이 붙거나, 없어지면 아쉽거나,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어지거나. 같은 물건도 누구에게 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매일 쓰는 물건이고, 누군가에게는 한 번 쓰고 서랍에 넣는 물건이다. 누군가에게는 아무 기능도 없지만 오래된 기억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물건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비싸게 샀지만 자리만 차지하는 물건이다.
그렇다면 가치 있는 물건이라는 것이, 애초에 제품 안에 완성되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산 뒤의 가치는 어디서 생길까
아트는 독백이다. 브랜드는 대화다. 타인의 삶에 닿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전에 쓴 문장이다. 그때는 브랜드가 어떻게 읽히고 이해되고 남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직접 물건을 만들기 시작하니 이 문장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좋은 재료를 고르고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어도, 그것이 가치 있는 물건이라고 만드는 사람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만들었다고 해서 그다음까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향이 나는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든 사람이 매일 그 향으로 기분을 전환할지, 몇 번 쓰고 잊어버릴지는 알 수 없다. 누군가에게 선물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물건은 기능과 별개로 ‘이 사람에게 이것을 주고 싶다’는 마음을 담는 역할을 이미 했을지도 모른다.
가치는 제품 하나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물건 사이에서 계속 달라진다. 그래서 만드는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제한적이다. 우리는 ‘가치 있는 물건’을 만들어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가치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 물건을 만들어 보낼 수 있을 뿐이다.
예쁜 쓰레기는 언제 만들어질까
예쁜 쓰레기라는 말을 종종 본다. 예쁘지만 쓸모없는 물건을 가볍게 부르는 말이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예쁜 쓰레기는 물건의 종류가 아닌 것 같다.
아주 실용적인 물건도 그 사람의 삶에서 아무 역할을 갖지 못하면 쓰레기가 될 수 있고, 아무 기능 없는 돌멩이도 누군가에게 특별한 기억이 붙으면 버릴 수 없는 물건이 된다.
그렇다면 예쁜 쓰레기는 공장에서 완성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 안에 들어온 뒤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자를 뜯지 않는다. 손이 가지 않는다. 왜 샀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 순간 물건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 구매는 일어났는데 관계는 시작되지 않은 것이다.
돈을 주고 책임까지 산다
물건을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이상한 일이다. 돈을 주고 물건만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에 대한 작은 책임도 같이 산다.
택배를 뜯어야 하고, 포장재를 분리배출해야 하고, 둘 곳을 정해야 하고, 쓰고 관리해야 한다. 언젠가는 버릴지 남길지도 정해야 한다. 물건 하나가 집에 들어올 때마다 작은 일이 하나씩 늘어난다. 그러고 보면 돈을 내고 스스로에게 일을 시키는 셈이다.
안 쓰는 물건을 볼 때 묘하게 마음이 불편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돈을 썼다는 사실보다, 스스로 선택해서 들여놓은 것이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물건을 소유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삶의 공간과 시간과 관심을 얼마쯤 내어주는 일이다. 그렇다면 만드는 쪽도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누군가의 돈뿐 아니라 공간과 시간과 관심까지 가져오는 것이 제품이라면, 적어도 그만한 가능성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또 하나의 물건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이미 세상에 너무 많은 물건이 있는데, 또 하나를 만든다.
그래서 제품을 볼 때마다 스스로 묻게 된다. 이것도 결국 예쁜 쓰레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
아직 답은 없다. 다만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사고 싶은 순간만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는 순간이 끝난 뒤에도 무언가가 시작될 여지를 남겨두는 것. 손이 가고, 감각이 움직이고, 기억이 붙고, 누군가에게 건네지고, 언젠가 다시 떠오를 여지를 만드는 것.
그 정도가 우리가 설계할 수 있는 영역인지도 모른다. 그것으로 충분한지는, 아직 우리도 답을 갖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