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이 도착한 날
금요일 늦은 오후에 샘플 상자가 도착했다. 병을 꺼냈을 때 우리가 먼저 확인한 것은 색이었다. 우리가 바란 것은 원물의 색이었지, 마른 콩의 색이 아니었다.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카카오가 제대로 감쌌다면 있어야 할 쌉쌀함과 깊이가 부족했고, 예상보다 달았다. 카카오 함량은 이유가 있어 정한 숫자였다. 50%는 달고 90%는 접근이 어려워, 채소와 베리 원물 코어의 지나치게 건강한 맛을 상쇄할 수 있는 70~72%로 잡아두었다. 그 균형이 샘플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름도 협의한 것보다 1mm가량 컸다.
여러 색을 몇 번씩 다시 먹어보아도 결론은 같았다. 이 상태로는 내보낼 수 없다. 원인은 휴일이 지나야 확인할 수 있었지만, 판정은 그 자리에서 끝났다.
현장에는 현장만이 아는 것이 있다. 코팅이 갈라지지 않는 두께, 알이 뭉치지 않는 함량, 라인이 감당하는 크기. 오랜 기간 공정을 다뤄온 전문가들의 판단은 대개 옳다. 우리가 피하고 싶었던 인위적인 광택을 없애는 쪽으로 공정이 집중되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결과물이 기준에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1mm가 왜 문제였는가
그 1mm를 이해하려면 처음 설계로 돌아가야 한다.
시작은 식이섬유가 가득한 초콜릿이었다. 원료 수급에 따라 16~21가지 식물성 원물로 만든 코어를 초콜릿 안에 넣는 구조. 압축한 코어 한 알의 지름은 3mm였고, 그 알을 여러 개 박아 넣는 그림이었다. 기존 설비가 만들 수 있는 최대치가 3mm였으니, 그 안에서 짠 설계이기도 했다.
여러 개를 넣으려 한 이유는 단순했다. 3mm 한 알로는 초콜릿의 양에 비해 식이섬유의 양이 너무 적었다.
그런데 여러 초콜릿 공장에서 같은 답이 돌아왔다. 완성된 구체 하나를 초콜릿으로 감싸는 것은 가능하지만, 작은 알을 여러 개 넣는 방식은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계산을 다시 했다. 코어를 1mm 키우면 초콜릿은 얼마나 늘어나는지, 코어와 초콜릿의 비율이 어디서 맞아떨어지는지. 부피에는 세제곱이 붙는다. 1mm는 눈으로는 작지만 부피에서는 작지 않다.
한 알만 넣으려면 그 한 알이 커져야 한다. 그런데 코어는 딱딱하다. 수분이 남으면 유통 과정에서 변질될 수 있어 건조 공정이 중요한데, 크기까지 커지면 초콜릿으로 감싸도 씹기 어려워진다.
조건은 셋이었다. 유통 과정에서 안전할 것, 거부감 없는 식감일 것, 맛이 좋을 것.
그 셋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크기가 코어 지름 5mm였다. 코어가 5mm면 초콜릿과 얇은 코팅까지 더해 9mm. 그 비율에서 식이섬유와 70%의 카카오, 그리고 첫 입의 바삭함이 맞아떨어진다.
설비를 우리가 들이기로 했다
문제는 첫 줄에서 막혔다. 5mm 코어를 뽑는 기계가 없었다. 아직 팔릴지 알 수 없는 제품 하나 때문에 설비를 새로 놓아줄 공장도 없었다.
결국 우리가 들이기로 했다. 협력 공장에 루메의 5mm 기계가 자리를 잡았다.
3mm로 모든 것을 맞춰놓은 뒤에 설비를 바꾸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크기만 커지고 나머지는 그대로인 코어가 나온다. 배합도, 건조 시간도, 코팅 두께도 처음부터 다시 잡아야 한다. 어차피 다시 할 일이라면 순서를 바꾸는 편이 나았다.
설비를 놓고 코어를 뽑아보며 하나를 더 알았다. 5mm 기계라고 해서 모든 알이 5mm로 나오지는 않는다. 굴리는 시간과 결합 정도에 따라 오차가 생긴다. 실제로 재어보니 5.5mm가 적지 않았다. 초콜릿도 굴려서 입히는 공정이라 거기서 오차가 한 번 더 붙는다.
그래서 기준을 다시 잡았다. 9mm가 가장 좋고, 9.5mm까지는 허용한다.
도착한 샘플에는 9.9mm가 있었다. 허용치보다 0.4mm 큰 알이었다.
기준을 적어두면, 그 기준이 우리를 붙잡는다
우리는 얼마 전 이렇게 적었다. 루메오브제가 가장 먼저 갖춰야 하는 것은 예쁜 신기함이 아니라 다시 먹고 싶은 제품력이라고. 씨알은 보기 좋은 콘셉트만으로는 안 되고, 입 안의 식감과 카카오의 쌉쌀함, 먹고 난 뒤 남는 느낌까지 좋아야 한다고.
그 문장을 쓸 때는 몰랐다. 그 기준에 가장 먼저 걸리는 것이 씨알 자신일 줄은.
전시 일정에 맞춰 타협하자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하나를 타협하면 다음 타협이 쉬워진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첫 제품은 앞으로 나올 모든 제품의 기준이 된다. 콘셉트를 보고 한 번은 살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선택을 만드는 것은 제품력이다.
씨알은 색과 맛을 다시 잡고, 우리가 정한 기준을 넘는 날 돌아온다.
하나가 빠지자 둘이 선명해졌다
보류를 결정하고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다.
키트가 더 또렷해졌다.
씨알·여운·여운취 세 제품이 함께 있을 때, 키트의 언어는 서로 다른 재료와 풍미였다. 여럿을 모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씨알이 빠지고 남은 두 제품을 다시 보니, 여운과 여운취는 애초에 한 쌍이었다. 후추 한 알을 초콜릿으로 감싼다는 같은 구조 위에서, 하나는 캄폿 블랙페퍼와 다크초콜릿의 깊이로, 다른 하나는 위스키에 침용한 화이트페퍼와 화이트초콜릿의 부드러움으로 갈라진 두 개의 변주다.
그래서 키트의 문안도 다시 썼다.
하나의 생각, 두 개의 여운
여운은 씨알과 같은 질문에서 태어났다. 어떻게 하면 몸에 좋은 것에 스스로 손이 가게 만들 수 있을까. 그 질문에 씨알은 식물성 원물과 반복의 방식으로 답했고, 여운은 감각과 미식의 방식으로 답했다.
날짜를 내려놓고 알게 된 것
7월 출시라는 날짜를 내려놓는 일이 아쉬울 줄 알았다. 그런데 결정하고 나니 오히려 가벼워졌다.
돌아보면 그 날짜가 기준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일정에 맞추려면 어딘가에서 눈을 감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씨알의 코어를 만드는 5mm 기계는 지금도 공장에 있다. 팔리지 않은 제품을 위해 들인 설비이고, 아직 한 번도 완제품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기계는 우리가 어떤 크기를 포기하지 않기로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