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 · 여운취를 시식하셨다면, 짧은 감상을 남겨주세요 | LUME OBJET coming soon

후추 한 알을 남기기로 했다

여운과 여운취가 만들어진 과정

우리는 후추 한 알을 갈지 않고 그대로 남기기로 했다. 여운과 여운취는 그 결정에서 시작됐다.

절인 후추에서 말린 통후추로

처음 우리를 붙잡은 것은 소금꽃에 절인 후추였다. 한 알을 그대로 입에 넣으면 단단한 껍질이 톡 터지고, 짠맛 뒤로 산미가 퍼졌다. 갈아 쓰던 후추에서는 만난 적 없는 식감이었다. 그 감각을 그대로 먹는 오브제 안에 담고 싶었다.

문제는 보관이었다. 절인 후추는 수분을 머금고 있어 냉장 보관이 필요하다. 상온에서 유통되는 초콜릿 안에 넣을 수는 없었다. 쓸지 말지 고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쓸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방향을 바꿨다. 절인 후추가 남긴 감각—작고, 맵고, 오래 남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그 기준을 말린 통후추에서 다시 찾기로 했다.

산지가 이름이 되는 후추

후추를 함께 만들 곳으로 루메가 1순위로 바랐던 곳은 오페퍼(Ö PEPPER)였다. 그곳은 후추를 ‘좋은 후추’라고 부르지 않고 캄폿, 마다가스카르처럼 산지의 이름으로 불렀다. 농장을 고르는 기준은 두 가지뿐이었다. 직접 수급해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그리고 산지의 맛과 향이 분명히 드러날 것.

유기농이나 비유전자변형을 조건으로 걸지 않았는데도, 그 기준을 통과한 농장들이 마침 그런 곳이었다고 한다. 좋은 것을 좇다 보니 다른 좋은 것이 따라온 셈이다. 유통과 포장을 줄이는 대신 농장에는 제시된 값보다 높은 금액을 지불하여, 산지가 오래 남도록 한다. 여러 산지를 섞지 않는 것도 원칙이었다. 섞지 않아야 그 산지의 종자가 남기 때문이라고 한다.

갈지 않은 후추

후추를 어떻게 넣을지에는 논의랄 것이 없었다. 가루가 되어 들어가면 첫 입과 마지막 입이 같아지고, 후추는 초콜릿 안에서 사라진다. 그래서 한 알을 그대로 남겼다. 한 알은 재료의 단위이면서 시간의 단위다. 초콜릿이 먼저 입에 닿고, 후추를 깨무는 순간 다른 맛이 시작된다.

후추의 매운맛은 혀가 맛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열을 감지하는 자리에서 읽힌다. 피페린이라는 성분 때문이다. 뜨겁지 않은데 뜨겁다고 느끼고, 그래서 다른 맛처럼 씻겨 내려가지 않고 천천히 식는다. 삼킨 뒤에도 남는 그 열감이, 루메가 붙잡고 싶었던 여운이었다.

여운 첫 샘플 · 블랙페퍼와 카카오 70.9%

후추가 남으려면 초콜릿도 자기 몫을 지켜야 했다. 카카오 50%는 달아서 후추가 첨가물처럼 묻혔고, 90%는 쓴맛이 강해 후추와 부딪혔다. 후추를 가리지도, 후추와 싸우지도 않는 자리 — 그렇게 정해진 것이 카카오 70%(첫 샘플은 정확히 70.9%)였다. 쌉쌀함이 먼저 오고, 후추를 깨물면 열감이 뒤따른다. 두 맛이 겹치지 않고 순서대로 온다.

여운에는 캄폿 블랙페퍼를 넣었다. 껍질을 그대로 두고 말린 후추라 복합적인 향이 껍질에 담겨 있다. 향이 진하고 거친 원물이라, 자기 향을 가진 다크초콜릿이 맞은편에 서야 했다.

여운취 첫 샘플 · 화이트페퍼와 날아온 독수리

여운취에는 마다가스카르 화이트페퍼를 골랐다. 화이트페퍼는 다 익은 열매의 껍질을 벗겨 말린 것이다. 한 겹을 벗기니 위스키가 겉에 머물지 않고 안까지 배어들 자리가 생겼다. 그렇게 스며든 향은 더 오래 남는다.

초콜릿은 화이트로 갔다. 다크초콜릿이 후추 앞에 서서 쌉쌀함을 먼저 낸다면, 화이트초콜릿은 그 반대 자리에서 자기 맛을 앞세우지 않고 뒤에 오는 것들을 살린다. 위스키 향이 흐려지지 않고, 첫 느낌에 부드러움이 더해진다.

위스키는 기원(Ki One)의 것이었다. 유니콘·독수리·호랑이 여러 원액 중 판단이 어려운 지점에서 기원의 의견을 따랐고, 그렇게 정해진 것이 독수리였다. 뒤늦게 본 기원의 테이스팅 노트가 그 선택과 겹쳤다. 긴 여운을 남기는 오크의 풍미, 통후추, 계피의 스파이스.

남기기로 한 한 알

쌉쌀한 것이 당기는 날에는 다크의 여운을, 달콤하고 강렬한 것이 당기는 날에는 화이트의 여운취를. 여운은 바쁜 하루의 틈이나 디저트 곁에, 여운취는 하루의 끝이나 한 잔의 위스키 곁에 놓인다. 후추 한 알을 갈지 않고 남기기로 한 결정이, 두 개의 리추얼이 되었다.